When you see a good move -- wait -- look for a better one. (Emanuel Lasker) 좋은 수를 발견했을 때는 -- 잠시 멈추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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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5 03:53:47

When you see a good move -- wait -- look for a better one. (Emanuel Lasker)

좋은 수를 발견했을 때는 -- 잠시 멈추고 -- 더 좋은 수를 찾아라. (에마뉴엘 라스커)

 

(3편은 좀 긴데 사진이 거의 없어서 그 대신 브금 하나 넣었음)

 

 

제3자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딱히 없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포커 플레이어라는 직업, 혹은 포커라는 게임에 대해 몇 가지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듯 느껴진다.

얘기를 하다 보면 금세 드러나는 그러한 선입견들의 대부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의 형태를 띤다.

 

"하루에 얼마까지 따봤어요?" 

"블러핑을 많이 하는 타입인가요? 다른 사람들을 리딩하는 능력이 뛰어난가요?"

"포커에서 역시 기술보다는 운이 중요한가요?"

"경쟁심이나 호승심이 강한 타입인가봐요?"

 

이미 나름대로의 답을 상정해 두고 하는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것은 상당히 성가시고 틸트가 오는 일이다.

그래서 어지간한 질문에는 그냥 적당히 둘러대는 편이고 별로 신경도 쓰지 않지만 

경쟁심이나 호승심에 대해 묻는 마지막 질문만큼은 - 그 사람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든 그렇지 않든 -

내게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경쟁심이나 호승심?

 

고등학교 때 은사님께서 갓 입학한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여러분들의 멋진 출발을 축하하며, 찬란한 앞날이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분이 무한경쟁의 궤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적잖이 놀라던 친구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당연히 축하 일색의, 조금은 진부한 인삿말을 기대하던 우리들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말씀에는 왠지 모를 여운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운 속에 자리잡은 깊은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은 아주 한참 뒤의 일이었다.

 

무한경쟁이라는 것은 허울좋게 들릴지는 몰라도, 실상은 끔찍하게 잔인하고 무서운 일이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대전제는 대략 이러하다.

경쟁이라는 것은 매 순간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며, 누군가 이기면 누군가는 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매 순간 끝없이 경쟁을 하지 않으면 누구든, 언제든 도태될 수 있다.

 

그렇다면 패자의 입장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 모두는 무엇을 위해서 경쟁을, 그것도 무한한 경쟁을 해야 하는가?

경쟁에서 이기는 일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고 숭고한 일인가? 

이러한 철학적인 질문들에 무한경쟁이라는 허울좋은 네 글자짜리 단어는 그저 굳은 침묵을 지킬 뿐이다. 

 

아주 오래전의 얘기처럼 느껴지고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는 다들 대학 입시라는 목표를 놓고 경쟁을 했던 것 같다. 

시험을 보면 상대적 우위에 따라 성적이 매겨지곤 했고

그 한두 자리 숫자에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슬퍼했다. 

시험이 지나고 성적이 발표될 때면 한동안 그 무겁고 눅눅한 분위기가 교실 안에 감돌았다.

 

기숙사 학교였기 때문에 그 분위기는 일과 시간을 지나 취침 시간까지 이어졌다.

교실에서는 침묵을 지키던 친구들이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누구는 수학 시험을 잘 봤는데 나는 망했다거나,

아무래도 영어 선생님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거나,

이대로 가면 나는 아마 자퇴를 해야 할 것 같다거나,

너는 이번 시험을 잘 봐서 좋겠다거나 하는 그런 얘기들.

그렇지 않아도 다들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모두의 감수성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고 왜곡시키는 수많은 얘기들.

 

그 친구들이 실제로 하고 싶던 얘기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번에 낮은 등수를 받은 건, 니가 나보다 좋은 등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저런 말을 입밖에 꺼낸 사람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그런 분위기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 등수가 올라간다는 것, 내 성적이 좋다는 것은 

나보다 등수가 낮고 성적이 나쁜 누군가가 필연적으로 생긴다는 것이다. 

누구도 이 필연성으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도망치거나,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불리함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상처가 되기도 한다.

 

폐쇄된 집단 내에서의 이러한 경쟁에 나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한없이 우울해졌다.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들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성적을 이유로 하나둘씩 자퇴를 했다. 

학교를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꼭 성적과 우정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 때마다 내게는 이유를 알수없는 죄책감 내지는 미안함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그나마 대입이라는 지상 목표라도 명료하게 있었고 다들 그걸 놓고 경쟁을 했지만

살다 보니 도대체 무엇 때문에 경쟁을 하고 있는 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뭔가에 홀린듯이 싸우고 있었고

승자는 추앙받고 패자는 무시 내지는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연애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쟁취한다는 표현은 진저리가 나게 싫었지만 모두가 쓰고 있었다.

게다가 하다못해 술자리에서 게임을 할 때에도 누군가는 꼭 승리를 원했다.

 

그때 나는 경쟁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마치 카톡의 단톡방처럼 누군가 나를 초대하면 나는 선택권도 없이 그냥 끌려가는 것이겠지.

하지만 언제까지 경쟁이라는 것에 그렇게 끌려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식의 진부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떻게 해도 경쟁을 즐길 수는 없는 성격이라는 것을

고등학교 때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가며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다만 내 나름대로 경쟁이라는 데에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필요는 있다고 느꼈다. 

한동안 겉돌던 나에게 그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다름아닌 포커였다.

 

다시 포커 얘기로 돌아가 보자.

 

포커는 물론 경쟁적인 게임이다. 

경쟁의 정도를 놓고 비교하면, 사실 대입 시험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한 경우도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 대부분의 포커 플레이어들을 포함해서 -

경쟁심이나 호승심이 강해야 포커를 잘 할수 있다고, 

일종의 충분조건처럼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경쟁의 대상이나 각도 면에서 내 생각은 사뭇 다르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포커를 쭉 치면서 나는 타인보다는 내 자신과 훨씬 더 많이 경쟁을 해 왔던 것 같다.

물론 포커에서 수익을 내려면 단기적으로는 상대보다 운이 더 좋아야 하고

장기적으로는 상대보다 더 좋은 결정을 해야 한다.

누구도 그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보다 더 좋은 결정"이라는 것이 반드시 상대와 경쟁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의 전략을 내가 미리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면

나는 그 직접적인 경쟁을 하지 않고도 상대보다 더 좋은 결정을 할 수 있고, 결국 수익을 내게 될 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전략을 예상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순수하게 내 자신과 경쟁하는 일이었다.

타인과의 자존심 싸움이라거나 감정적 소모 따위는 개입되지 않아도 좋았다.

내게는 포커의 그런 점이 처음부터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만나온 대부분의 포커 레귤러들, 특히 온라인 레귤러들은 매우 경쟁적이었다.

그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의 전략을 놓고 뭔가 흠집을 잡거나 깔아 뭉개는 일에서 의미를 찾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2+2 같은 곳에서 대놓고 싸움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ego를 무한히 발산하며 마초적인 영역 싸움을 하는 저런 모습에는 조금도 흥미가 가지 않았다.

내 성격상 저런 걸 즐길 수 있다는 생각도 도저히 들지 않았다. 

 

시간이 있으면 내가 어려움을 겪었던 핸드들을 리뷰하고 전략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일은 무척 재밌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자신과 경쟁하는 일이었다. 

타인이 개입되면 그 경쟁은 이미 처음의 생산적이고 향상적인 의미를 상실했다. 

더이상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목표도 없는데 

의미를 납득할 수 없는 경쟁을 즐길 수 있을 리가 나로서는 만무했다.

 

언젠가 이런 내 모습에, 이상하리만치 경쟁을 피하고 그냥 늘 혼자서만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에 회의가 느껴져서 

필 갤펀드와 술을 마시면서 저런 부분에 대한 의견을 물어본 적이 있다.

 

with_phil.jpg

 

나는 헤접을 오래 쳐왔는데 기싸움이나 자존심 싸움을 해본 적이 없고 이게 혹시 릭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그 때 갤펀드는 아무런 주저없이 "그런 싸움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내게는 커다란 안도감을 가져다 주었다.

그냥 지금 하던대로 쭉 혼자 묵묵히 노력해도 포커로 수익을 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는 의미일 테니까.

적어도 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는 반증일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라이브 포커, 특히 라이브 토너먼트 포커는 내게 상당히 어렵게 느껴진다.

모니터 뒤에 앉아서 마우스로 버튼 몇개를 클릭하는 게 내 평소 직업이라면

라이브 포커는 실체적인 존재와 실체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나 역시 내 존재와 감정을 드러내며 결정을 해야 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계속 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경쟁이라는 게 보다 직접적인 의미로 와닿게 된다.

머릿속으로는 "그냥 나 혼자서 꾸준히 내 할일을 하면 될거야"라고 생각을 해도 

실제로 그런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내게 좋은 감정을 가지면 그 나름대로,

나쁜 감정을 가지면 또 그 나름대로 이래저래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마련한 해결책은 끊임없이 노트를 적는 것이다. 

라이브 포커는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에 25-30 핸드 정도밖에는 플레이가 되지 않는다.

조금 집중하고 약간 노력하면 누구든 핸드 하나하나에 대해 간단하게 노트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걸 되풀이해서 읽어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각 상대의 전략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그리고 나는 어떻게 대비하면 될지

제한된 시간 안에서 서투르게나마 준비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타인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내 자신과 경쟁하며

최선의 플레이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내게는 무엇보다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전략에 대해 심사숙고를 하다 보면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커다란 릭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한 마디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어딘가 전략적인 불균형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PLO를 예로 들자면 상대의 레인지가 캡이 되는 부분이 존재하고, 

이걸 우리가 공격했을 때 상대는 거의 방어를 하지 못한다. 

토너먼트를 예로 들자면 상대가 오픈 레이즈를 했을 때 우리가 IP에서 2.2-2.4배 정도의 작은 3벳을 하면 

프리플랍에서든, 포스트플랍에서든 대부분의 상대는 매우 정직하게 플레이하게 된다.

이렇게 전략을 하나씩 마련하면서 플레이에 깊이를 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건 꾸준히 관찰을 하고 깊게 생각하는 습관이 없으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참가한 6max PLO 토너먼트에는 $3k라는 바이인이 무색할 정도로 약한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딥스택에서 KQJ3:xxx 같은 핸드로 OOP 3벳을 한다거나 

역시 딥스택에서 드라이 AA로 765r 보드에서 첵콜을 한다거나 하는 플레이들이 빈번했다.

한 편으로는 필드가 소프트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만큼 더욱더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실수를 한들, 내가 여기에 대한 전략을 준비해서 최선의 결정을 하지 않으면

상대의 실수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포커 플레이어들은 여기에서 많은 것들을 놓친다.

"와 저런 걸로 콜을 따고 들어오네, 미친놈 아냐?"라고 감정을 섞어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프리플랍, 플랍 콜링 레인지에 약한 핸드가 너무 많은데 잘 보니까 턴부터는 폴드를 많이 하네. 

그렇다면 나는 턴이나 리버까지 배럴하는 빈도를 높이는 게 좋겠군.

스트릿별로 사이징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없이 포커에서 장기적으로 수익을 내는 것은 아주 어렵다.

무한경쟁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노력해서 나를 밟고 넘어설 테니까.

그때는 아무리 싫어도 자신과의 경쟁이 아닌 타인과의 경쟁이 될 테니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노트를 적어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또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적당히 대꾸도 하고, 때로 nice hand라고 외치면서 토너먼트를 플레이하던 도중

day 1이 거의 끝나가면서 흥미로운 핸드가 하나 생겼다.

 

테이블 유효 스택이 60-70bb 정도인 상황이었고 버튼에서 8754ds가 들어왔다. 

상당히 루즈한 플레이어가 하이잭에서 2.5x로 오픈 레이즈를 했고 컷오프는 광속 폴드를 했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 플랫을 했다. 

캐시게임이라면 교과서적인 3벳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게 아마 가장 +EV인 옵션일 가능성이 높지만

토너먼트에서는 이런 식으로 배리언스를 높이는 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필드에 비해 내 엣지가 크다고 느끼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3벳을 해도 루즈한 상대는 폴드를 거의 하지 않을 것이고

플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8하이로 이 팟을 이길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해진다.

그리고 플랍을 제대로 맞추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는 내 포커 실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고 배리언스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그 배리언스를 받아들일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다.)

 

스몰 블라인드는 폴드를 했는데 

루즈하고 뭔가 좀 나사가 빠진 것 같았던 빅블라인드가 아주 자신있게 3벳 팟을 외쳤다.

원래 레이즈가 2.5bb였으니, 저 3벳은 10.5bb 레이즈였다. 

아무리 봐도 패기있게 팟! 이라고 외칠 때의 희열감 때문에 이 토너먼트에 참가한게 아닌가 싶은 플레이어였다.

3벳 레인지는 대충 25% 정도, 타이트하게 봐줘도 15% 정도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하이잭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하이잭이 고민을 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처음에 콜드콜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결국 고민을 하다가 아몰랑 콜을 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폴드하는 경우를 본 적이 아예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 옵션 역시 콜이 거의 유일해진다.

하이카드 블라커가 없는 상황에서 4벳을 하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이 따른다.

둘다 스냅콜을 하고 따라올 가능성이 85% 정도 된다. 

하이잭이 고민을 하는 동안 나는 3웨이 3벳 팟에서 8754ds의 에퀴티가 대충 어땠더라, 하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30초 정도가 흘렀을 즈음 하이잭이 갑자기 "팟"을 외쳤다 (34.5bb).

??????

 

성가신 상황이었다.  

이 백레이즈를 콜하면 빅블라인드가 5벳을 날릴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34.5bb를 콜하고 나머지 30bb 정도에 폴드할 수는 없으니, 

이 경우 나는 8하이로 내 스택 전부와 토너먼트 라이프를 걸게 된다.

빅블라인드가 5벳을 날리지 않고 그냥 4벳에 콜만 한다고 해도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다.

플랍이 뜨기 전에 팟에는 이미 100bb가 넘게 들어가게 되고 

플랍에서 페어 하나 혹은 드로우 하나만 맞추더라도 남은 스택을 다 넣어야 한다.

이것만 따져보면 4벳에는 그냥 폴드하는 게 맞다고 느꼈다.

 

하지만 PLO 프리플랍 에퀴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경험상 두 플레이어의 레인지에는 하이페어나 하이카드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8754$ds는 3웨이 팟에서 36-40%에 가까운 에퀴티를 가지게 된다.

게다가 두 명 모두 AA를 들고 있다면 내 에퀴티는 42% 정도가 된다.

최악의 경우에도 내가 3웨이 팟에서 33% 미만의 에퀴티를 가지는 일은 거의 없다.

 

혹시나 싶어서 하이잭과 빅블라인드의 동공을 주시하고

공기중에 떠다니는 그들의 페로몬 냄새를 맡아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들의 선글라스에 반사된 어리둥절한 표정의 내 모습 뿐이었다.

페로몬 냄새 역시 내 향수 냄새에 가려 느껴지지 않았다. 

 

일반적이라면 그냥 잠깐 고민을 하고 폴드를 했을 스팟이었다.

8하이로 내 토너먼트 라이프를 걸 이유가 별로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몸을 사리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매 순간 최선의 결정을 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노력을 해왔고

토너먼트 참가 자체만을 두고도 한참을 고민해 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이 플레이가 +EV라면 얼마나 +EV인지

그걸 패스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엣지가 큰지, 그렇지 않은지 분석을 해야 했다.

 

일단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기로 했다. 

즉 내가 이 4벳을 콜했을 때 빅블라인드가 남은 스택을 다 집어넣고, 

하이잭과 내가 모두 올인을 콜한다는 가정이었다. 

유효 스택이 65bb 정도였으니 최종 팟은 195.5bb가 되고 

내 평균 에퀴티를 37% 정도로 잡으면 내 EV는 72.3bb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냥 폴드를 하면 65bb에서 2.5bb를 내고 폴드한 것이니 EV는 62.5bb가 된다.

자세한 부분은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의외로 10bb 정도의 차이가 날 수 있는 스팟이었다.

시간을 들여서 계산하지 않으면 이 정도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자칫하면 10bb 정도의 +EV가 될 수 있는 이 스팟을 포기할 정도로 내 엣지가 큰가?"

그리고 이건 에퀴티 계산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였다.

 

이 정도 토너먼트에서 65bb나 62.5bb는 거의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트리플업해서 200bb 정도의 스택을 가지는 것도 65bb 스택을 가질 때에 비해 3배 정도로 유리할 리는 없다. 

하지만 10bb는 지금 내 스택인 62.5bb의 16% 정도에 해당한다. 

내가 버튼에서 오픈레이즈를 하고 빅블라인드가 콜을 했을 때

평균적인 내 EV가 아마 +1bb 정도일 거라고 (다소 낙관적으로) 가정해 보면

그런 기회의 10배에 해당하는 정도의 엣지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 봐도 내 엣지가 그 정도로 크다는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EV를 떠나서, 60%가 조금 넘는 확률로 나는 탈락을 할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토너먼트는 탈락하면 끝이므로 그 뒤에는 EV고 뭐고 없다.

반면에 지금 이 스팟을 그냥 폴드해서 넘기고 스택을 유지하면 

day 1을 별 무리없이 마무리하고 day 2까지 순항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플레이어 중 한 명이 클락을 요청했다. 

플로어가 와서는 초시계를 내밀면서 1분을 주겠다고 했다.

조선 오프에서는 처음부터 다짜고짜 15초를 세기 시작하는데.. 하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면서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1) 최악의 경우에도 EV가 +3bb 정도,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10bb 정도가 될 수 있는 스팟이다.

+3bb라면 쉽게 패스할 수 있지만 +10bb는 그럴 수 없다.

2) 하지만 60% 정도의 확률로 탈락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EV 같은 건 아무 의미도 없어진다. 

나는 이 토너먼트에서 큰 엣지를 가지고 있고, day 1이 어느새 끝나가고 있다. 

3) 상대의 동공은 보이지 않고, 페로몬 냄새도 나지 않는다.

 

막막했다.  무엇 하나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근접한 결정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근접한 결정은 사실 길게 봤을 때에는 어느 쪽이든 크게 상관이 없다.

하지만 나는 장기적인 EV를 생각하기에 앞서 지금 이 순간에 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결정에 따라서는 지금이 분수령이 될 수도 있었다.

사실 모든 결정 하나하나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토너먼트인 것이다.

 

플로어가 30초가 남았다고 말해 주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두명 중 한 사람이 내 런다운을 도미네잇하는 T987$ds 같은 핸드를 들고 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는 얘기도 아니고, 그럴 경우 내 에퀴티는 아마도 끔찍해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빅블라인드가 4벳에 폴드를 한다면? 

이 경우는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30초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을 두고 전자의 경우가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포커를 쭉 플레이하면서 비싼 값을 주고 배운 것이 몇 가지 있다.

이런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여러번 그들에게 얘기를 하기도 한다.

그 중 하나는 "여러 가지 가정이 맞아 떨어져야만 +EV가 될 수 있는 플레이는 가급적 피하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가정을 세운 뒤에 최악의 경우에도 이건 +EV라고 일단 무턱대고 가정해 놓고 시작했지만

사실은 그 가정들이 얼마나 믿을만하고 확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간과한 것이다.

 

플로어가 10초부터 카운트다운을 하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지금까지의 생각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정리해 보고 

눈을 질끈 감고 내 핸드를 muck으로 던졌다.

+10bb인 상황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엣지가 크기 때문은 아니었다.  내 엣지는 아마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10bb라는 계산의 토대가 된 내 가정들에 그 정도로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일순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최선의 결정을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커다란 걸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손이 가는 대로, 직감이 이끄는 대로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천천히 생각해 본 것 자체에 대해서는 일말의 뿌듯함도 느꼈다.

 

내가 폴드를 하자 마자

빅블라인드는 내가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스택을 전부 팟으로 밀어넣으며 올인을 외쳤다.

하이잭은 잠깐 고민을 하더니 인상을 쓰며 콜을 하고 카드를 오픈했다.

 

빅블라인드: As Ah Ks Kh

하이잭: Ad Kd Kc 9s

 

AA가 88% 정도로 유리한 상황이다.

PLO 프리플랍 에퀴티 중에서 이 정도로 한 쪽이 유리한 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뿔싸

 

플랍: 8d 6d 2d

 

빅블라인드는 한숨을 한번 푹 쉬며 nice hand를 외치고 짐을 싸서 자리를 일어났다.

더블업을 한 하이잭은 this is PLO! 라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하며 칩을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뭔가 이 순간 지금까지는 흔적도 없던 페로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도 같았다.

 

하이잭이 생각하는 PLO가 어떤 게임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내린 결정들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그리고 플랍에 깔린 세 장의 다이아몬드와 그걸 본 빅블라인드의 허탈한 표정을 떠올려보며 

"무한경쟁"에 대해 말씀하신 고등학교 은사님의 생각이 잠깐 스쳤다.

 

포커든 인생이든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도 가끔은 그냥 대책없이 끔찍한 결과가 생기고 질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 역시 무한경쟁의 범주에 포함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확실히 포함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토너먼트를 플레이하며 경쟁을 벌이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므로.

"조금만 운이 좋으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어"라는 아메리칸 드림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므로. 

그래서 그 끔찍한 결과, 필연적인 불운, 소위 "배리언스"라는 것 모두가 

포커 플레이어로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일종의 굴레같은 것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 핸드 이후에는 이렇다할 만한 일이 없이 day 1이 마무리되었고 

80k 정도가 되는 스택으로 나쁘지 않게 마무리를 했다.

15k 스택으로 시작했으니 괜찮은 결과였고, 조금은 안도해도 좋았겠지만

복잡다단한 생각에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어져 서둘러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기분은 오랫동안 해온 복싱을 최근에 조금씩 피하게 된 이유와도 맞닿아 있었던 것 같다.

내 자신과 싸우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지만,

타인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순간들은 항상 찾아오게 마련이었고 그 때마다 나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이런 경쟁을 계속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조금 없었다. 

 

day 1의 결과와는 전혀 무관하게, 포커를 전업으로 한다는 일 자체가 문득 섬뜩하게 느껴졌다.

수백 번은 느껴왔던 감정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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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

 

43

2015.12.25 04:37:28

2015.12.25 04:42:28

2015.12.25 04:52:29

2015.12.25 07:22:26

2015.12.25 09:01:19

나도 경쟁같은건 그닥 관심이 없음. 상대방을 이긴다고 해도 내가 발전하는거 같지가 않아서. 게다가 상대방이 없어지면 그순간 내 발전은 끝나버리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카지노 게임이나 슬롯머신엔 관심이 없었지만 포커에는 관심이 생겼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어느정도 보장을 받을 거 같아서.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포커를 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지금까지 플레이 했던 방식과 얻었던 돈과 잃었던 돈을 결국 따져보면, 나는 그다지 돈을 못딴다는 사실을 알아냈었다. 사실 정확하게는 수익을 낸 시점은 내가 생각을 바꾸고 돈을 얻는 게임형태(오마하 -> 프리롤)를 바꾸어서 수익을 내고 있었더라고. 그러니까 프리롤로만 얻은 돈이 내 뱅크의 90%수준?

그러다가 정신적인 상담을 받게되면서, 나의 몇가지 특징을 알게되고 다시 생각을 해보니, 결국 돈때문인것도 있었지만 상대방을 누르고 이기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지. 그 때문에 올인 스릴을 즐기는거 같더라고. 덕분에 많이 털렸지만. 어렸을때 너무 많이 학대당해서 그런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나는 경쟁보다는 매 현재상황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게 대응하는 방식을 더욱 선호한다. 멘탈이 약해서 잘 안되기는 하지만, 나는 몸도 안좋고 스트레스에도 과민반응을 보여서 이런 방식으로 살아야 더 편안한거 같더라고.

어쨋든, 내가 말하고 싶은것은 경쟁이 있든 없든을 떠나서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을 찾는것이 더욱 중요하다는것. PLO 토너먼트에서 8754ds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했다는거 자체가 매우 훌룡한 자세라 생각한다. 그렇게 고민을 해서 무슨 결과를 얻는 결국 자기를 발전시키는 일이니까.

2015.12.25 09:21:47

2015.12.25 11:31:58

2015.12.25 18:59:27

2015.12.25 20:03:11

2015.12.30 09:44:53

2016.01.02 10: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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