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gress always appears much greater than it actually is. (J. Nestroy) 진보라는 것은 무릇 그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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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21 23:44:12

Progress always appears much greater than it actually is. (J. Nestroy)

진보라는 것은 무릇 그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이는 법이다. (네스트로이)

 

rainy.jpg

 

창밖으로 비가 내린다. 

이런 날 호숫가와 하늘을 보고 있으면 지금이 몇 시인지, 그리고 여기가 어디인지 종잡기 어려워진다.

포커를 전업으로 시작하고 나서 참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나는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건가 하는 물음도 던져보게 된다. 

비가 오는 날의 이런 시공간적 모호함을 나는 참 좋아한다.

 

담배를 처음 피워보던 날을 아직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학교 3학년 때, 비가 내리던 어느 봄날이었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을 걸 사들고 오토바이를 타고 수업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여러 브랜드의 담배가 진열되어 있는 걸 보고 문득 "한번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팔리아먼트 라이트를 한갑 샀다.

생각해 보면 그 전까지는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신기하리만큼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술을 먹으러 학교에 다니는지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지 자타가 다 헷갈릴 정도로 술을 퍼마시고 살았는데

그러면서도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담배 한 갑을 사서 편의점을 나서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아무래도 오토바이를 타기엔 위험할 것 같아서 담배나 피우면서 걸어가볼까 하는 마음에 일단 걷기 시작했지만

한참을 걷다가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깜박하고 라이터를 사지 않았다.

아니 담배를 피워보는 게 처음이니 깜박한 게 아니라 그냥 몰랐던 거다.

담배에 불을 붙이려면 라이터가 있어야 한다는 

초등학교 자연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사실을.

 

그렇게 우연히 피기 시작한 담배를 그로부터 4년 반 정도 쭉 피웠다.

홀덤 초창기이던 시절에 오프라인에서 건달 형님들과 맞담배를 피워보기도 했고

건달형님 1로부터 "넌 어째 담배연기로 도나쓰 하나를 못 만드냐?"라는 억울한 핀잔도 들었다.

그걸 보고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형님 요즘 대학교에서 이런건 안 가르치나 봅니다"하는 건달형님 2의 말도 들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런 건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물론 입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나도 최소한의 개념이나 예의범절 같은 것은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농구에 미쳐 있었던 한 때

땀이 뻘뻘 흐르도록 농구를 하고 나서 온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을 느낄 때

그런 상태로 체육관을 나서면서 담배를 한 개피 물고 폐속에 니코틴을 가득 채우면 세상 무엇도 부럽지 않았다.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런 기분이라면 어떤 일이든 그냥 웃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배가 건강에 안 좋다는 얘기는 어디 먼 혹성의 생명체에 관한 얘기처럼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젊고 어려서 그랬던 것 같지만

어릴 때엔 그렇게까지 인생을 멀리 내다보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했다.

 

그리고 4년 반 뒤의 어느날 문득

이제부터 담배는 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사귀던 여자가 몸이 좋지 않았고 담배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누구에게 설명을 하기에도, 내 스스로도 이해하기에도 편했다.

내가 저렇게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여자친구분이 좋은 남자친구를 두었네요"라며 칭찬해 주었고

그럼 나는 적당한 표정으로 "아닙니다 당연한 건데요 뭘" 따위의 대꾸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담배 자체에 싫증과 염증이 났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였던 것 같다.

병적으로 싫증을 잘 내는 내 성격이 담배의 중독성조차 깔아 뭉개는구나 하는 생각은 

스스로도 왠지 꺼림칙하게 느껴져서 하고 싶지가 않았지만

실은 어쩌면 단지 그뿐이었을 거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스스로 나서서 끊을만큼 부지런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겠지.

 

그 뒤로 담배에는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다.

더러 뜻밖의 계기로 헤어진 연인이 생각나고, 한번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잠깐 스쳐가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있을 때면, 혹은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담배를 다시 한번 꺼내서 피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그건 그냥 생각뿐이었다. 

한번 헤어진 연인과 다시 잘 되기가 무던히도 어려운 것처럼

담배를 다시 피우는 것 역시 내게는 이미 어려운 일의 범주에 속해 있었다.

 

포커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9년 정도가 되었고 

온라인 포커만 해도 햇수로는 6년 정도가 되어 간다.

처음 시작할 때엔 싯앤고와 MTT를 플레이하기 시작했고 그걸 4-5년 정도 계속해 왔지만

언젠가 캐시 게임으로 전향하고 나서부터는 토너먼트에는 거의 관심도 가지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일단 토너먼트는 캐시게임에 비해 배리언스가 너무 심하고 

아주 초반을 제외하면 딥스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숏스택 포커도 물론 그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딥스택 포커의 깊이에는 비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숏스택 포커에서의 엣지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올인 에퀴티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결국은 플립을 많이 이기는 사람이 (단기적으로는) 토너먼트에서 많은 수익을 내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무엇에든 싫증을 잘 내는 내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4년이 넘는 동안 100만 핸드를 훨씬 넘게 플레이하면서

위에서 말한 저런 것들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엣지를 만들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다고 확신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냥 토너먼트라는 것 자체에 어느 정도 염증이 나 있었다.

한때 뜨거웠던 마음과 복잡다단한 감정의 대상이었던 옛사랑처럼.

매일 한갑 정도를 피우던 담배처럼.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 좋아했던 것들은

일단 내 마음이 돌아서고 나면 그 반작용에서인지 훨씬 더 큰 반감과 염증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3k 6max PLO 토너먼트를 나가기로 결심하기까지 의외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실은 뭔가 의욕이 넘치던 참가 당일까지도 토너먼트 시작 몇 시간을 앞두고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다.

처음 계획은 "WSOP 기간 동안에는 그냥 사이드 캐시 게임만 치고 오자"였다.

토너먼트 자체에 대한 염증도 염증이거니와

다들 잘 알겠지만 토너먼트는 어차피 80% 정도의 확률로 참가비를 날리고 집에 돌아오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굳이 비행기를 타고 먼 길을 날아가서

몇 시간이고 지루함과 싸워가며 원테이블 토너먼트를 플레이할 자신이 없었고

어차피 80% 정도의 확률로 캐시인을 하지 못하고 떨어질 텐데 

그 때의 좌절감이나 허탈함을 이겨낼 자신도 솔직히 없었다.

 

딱히 바이인 금액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프에서나 온라인에서나 하루에 날려본 금액에 비하면

$3k 바이인 정도는 그냥 한숨 한번 푹 쉬고 웃고 넘길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뭔가 내 발목을 잡아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의 정체는 어쩌면 막연한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캐시게임과는 다르게 토너먼트는 "실패"의 빈도가 월등히 높으니까. 

실패는 단돈 2불짜리라고 해도 기분이 상하는 법이다.

 

그러다가 두 가지의 이유로 마음을 돌려 참가하기로 했다.

하나는 이게 홀덤이 아닌 PLO, 그것도 6max 토너먼트라는 것.

최근 2-3년 정도 온라인에서 주력으로 플레이해 온 6max PLO 캐시게임과 상당히 많이 닮아 있고

게다가 PLO 토너먼트라면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크고작은 실수를 연발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즉 여느 토너먼트에 비해 내 엣지가 조금 더 크고 배리언스는 아마 조금 더 작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친구이자 내가 가장 존경하는 포커 플레이어인 필 갤펀드가 

나의 이런 고민에 대해 "너라면 나가는 게 당연히 +EV 아닐까?"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이 어느 정도 있어도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자신과 확신은 엄연히 다른 레벨의 감정이므로)

나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가 저런 격려를 해준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분야를 막론하고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을 거다.

 

갤펀드가 격려를 해줬다고 해서 내가 입상할 확률이 높아지거나 캐시인에 실패할 확률이 낮아지는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EV인게 확실하고 바이인 금액이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면 일단 나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물론 교과서적인 얘기다.  제3자의 얘기라면 나도 애초부터 저렇게 조언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커를 치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역지사지의 자세를 갖는 것과 내가 스스로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결정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레벨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래서 내가 실제로 저렇게 결심을 하기까지에는 시간이 꽤 걸렸는지도 모른다.

 

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참가신청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얼른 택시를 타고 Rio로 향했다.

가는 길에 친구 두 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둘다 이 토너먼트에 참가한다면서 액션을 스왑하자고 했다.

"실력도 비슷하고 배리언스 줄이고 개꿀!"이라는 요지의 말이었다. 

같이 점심을 먹는 동안 생각을 잠시 해보고 콜을 했다.

어차피 이번 PLO 토너먼트는 홀덤 토너와는 다르게 필드도 작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텐데 

이 친구들이랑 서로 응원하면서 열심히 해 보는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EV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적어도 그렇게 하는 게 덜 외로울 것 같기도 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캐셔에 가서 참가 신청을 했다.

 

plo_ticket.jpg

 

이 토너먼트는 4시에 시작이었다.  아직 4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각여삼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그 40분은 참 느리게도 흘렀다.

나는 1분을 60초로 쪼개고, 그 1초를 다시 10조각 정도로 쪼개고를 반복하며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공간의 한 점을 멍하게 응시하며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얼 찾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아주 오랫만에, 마치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이,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담배연기를 좋아하지 않고 건강이 늘 좋지 않았던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의 생각도 불현듯 떠올랐다.

기억속 서랍 어딘가에 깊이 처박아두고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내 감정들도.

 

기억이라는 건 참 묘한 것이다.

몇년 전 내 모습 같은 건 스스로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절을 같이 보냈던 사람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좋아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 당시의 내 모습도 어느덧 손을 내밀면 잡힐 것처럼 가깝게 떠오른다.

너무 마음의 상처가 되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만둔 연애였지만

결국 지나고 보면 이기적인 건 언제나 내 쪽이었고 나보다는 상대편의 상처가 몇 배는 더 컸을 거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 뒤로 나이를 몇살 먹었지만 나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처럼 

나는 앞으로 나가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며 노를 젓고 있지만

실은 그저 끝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담배를 태우기 시작하면 너무 복잡한 감정들이 물밀듯이 몰려와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그녀가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음료수를 하나 사들고 이런저런 생각들을 뒤로한채 토너먼트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너먼트장에 들어서니 쇼맨십이 넘칠 것 처럼 생긴 딜러가 역시나 쇼맨십을 부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걸 보고 와! 하면서 사진을 찍어주겠지?" 하며 들뜬 마음으로 PLOH를 만들었을 저 딜러의 모습을 생각하니

왠지 틸트가 좀 몰려왔다.

모르긴 해도 거울을 보며 포즈와 표정도 여러번 연습했을 것만 같았다.

 

showman_dealer.jpg

 

필 헬뮤스는 열심히 뭔가를 먹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수다스럽고 투덜대는 모습은 아직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모습도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내게 틸트를 선사했다.

 

hellmuth.jpg

 

테이블에 다른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 가볍게 목례를 하고 good luck이라는 말을 했다.

내 의지나 심리 상태와는 상관없이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딜러가 첫 핸드를 돌렸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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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

 

54

2015.12.22 00:02:00

2015.12.22 00:03:52

@악재

2015.12.22 00:24:44

2015.12.22 07:48:22

2015.12.22 08:14:39

2015.12.22 01:00:32

2015.12.22 02:10:57

2015.12.22 01:08:52

2015.12.22 02:11:04

2015.12.22 11:27:44

2015.12.22 14:20:42

2015.12.22 21:20:06

@바나나

2015.12.23 02:36:04

@포스잡고싶다

2015.12.23 07:22:39

2015.12.23 07:49:05

@포스잡고싶다

2015.12.23 02:25:09

2015.12.23 05:21:02

@맨날틸트옴

2015.12.31 23:4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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